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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섬이 된 쑥섬에 개와 닭이 없는 이유는[김준의 섬섬옥수]고흥 애도(쑥섬)
고흥하면 나로도가 우선 떠오른다. 쑥섬 애도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숲동산에 놀라고 심성 좋은 사람에게 다시 놀란다.

“밖에서 볼 때하고 완전히 다른데, 원시림이야. 이 나무 좀 봐.”

60대 중반 쯤 되는 대여섯 명 여행객들이 ‘동산’으로 접어들자 탄성을 지른다. 사실이다. 겉으로 보면 쑥섬은 열댓 집이 모여 사는 자그마한 섬이다.

특히 나로도항에서 건너다보면 초라한 작은 섬에 불과하다. 하비난 섬으로 들어와 마을당산이 있는 숲 ‘동산’으로 들어서면 육박나무, 너도밤나무, 동백나무 등 울창한 숲에 깜짝 놀란다.

주민들이 함부로 들어가지 않던 울창한 마을숲 ‘동산’을 개방하면서 여행객에 당부하는 말을 적어 놓았다.
주민들이 함부로 들어가지 않던 울창한 마을숲 ‘동산’을 개방하면서 여행객에 당부하는 말을 적어 놓았다.

어른 몇 사람이 손을 맞잡아야 안을 수 있는 나무들도 있다. 속살을 들여다보면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 작은 섬이 더욱 그렇다. 이게 어디 섬뿐이랴.

외로운 섬 나하나 꽃 피다

섬이 외로운 것은 사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찾는 이가 적어서 서로운 것도 아니다.

섬을 알아주는 이가 적고 섬살이를 공감하는 이가 적기 때문이다. 섬을 여행 대상이나 놀이나 체험 장소 정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쑥섬에 정원을 가꾸는 김상현 고채훈  부부
쑥섬에 정원을 가꾸는 김상현 고채훈 부부.

 주민 자긍심과 섬 존재감을 위해 나무를 심고 꽃을 피우며 작은 섬을 가꾸는 사람이 있다. 김상현 고채훈 부부다. 교사와 약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부부는 쑥섬이 고향도 아니다. 장애를 가진 어머니를 돌봐야 했던 아들, 어머니를 돌보고 고향을 지켜야 하는 남편을 만나 시골에 약국을 차린 아내. 부부가 쑥섬에 찾았을 때 주민들은 땅을 사러 다니는 투기꾼 쯤으로 알았다. 전국 정원과 수목원을 답사하고 틈틈이 독학으로 식물공부를 했다. 한푼 두푼 모아 조금씩 섬 땅을 사서 꽃과 나무를 심었다.

노인들만 있지만 섬을 잘 가꾸면 새 생명을 넣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힘든 줄 몰랐다. 그렇게 10여년이 지났다.

태풍에 심은 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가뭄에 타 죽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애지중지 가꾼 비밀정원을 작년부터 개방했다. 정원만 아니라 마을 숲과 섬길도 직접 정비하고 가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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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급기야는 아버지도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자신과 가족의 노동력은 물론 돈까지 써야 하는 일이었다. 주민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나무와 달리 꽃은 매번 모종을 심어줘야 한다. 내년을 위해 금년 봄부터 모종을 심고 가꿔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100여 종을 심었다.

별정원을 가꾸는 고채원 선생님
별정원을 가꾸는 고채훈 선생님.

남편은 이 모든 것을 약사인 아내 덕분이라고 한다. 약국 옆에 작은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모종을 키우는 아내는 남편이 인정하는 꽃과 나무 박사다.

자신은 일꾼이라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쑥섬은 최근 전라남도가 인정하는 민간정원 1호가 되었다. 부부가 가꾼 정원 한 가운데 이런 시가 쓰인 세워져 있다.

나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은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 조동화, 나하나 꽃피어

비밀정원을 여행객에게 개방한 이유가 있다. 옆 섬 사양도가 내년이면 연도교로 이어진다.

사양도와 쑥섬을 돌아 나로도 축정항으로 오가는 배가 운항을 중단할 위기에 있다. 배를 타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동산’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본 나로도항(축정항)
‘동산’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본 나로도항(축정항)

그래서 여행객이 찾도록 쑥섬 가치를 잘 알리고 싶었다. 내친김에 비밀정원을 힐링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많은 사람이 찾는 섬보다는 섬을 느끼고 섬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와주길 기대한다. 그런 사람들은 부부가 쑥섬에 마련한 펜션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도 있다.

“이래봬도 돈섬 이랑께”

쑥이 좋고 많아서 애도(艾島)라 했다. 주민들은 지금도 쑥섬이라 부른다.

애도는 중선배도 부리고, 서해와 남해를 누비며 고기를 잡던 때는 80여 가구 300여 명이 살던 섬이었다. 배를 타기 위해 섬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쑥섬의 서쪽은 벼랑으로 해식애가 발달해 있으며 거문도, 손죽도와 마주한 큰 바다와 접해 있다.
쑥섬의 서쪽은 벼랑으로 해식애가 발달해 있으며 거문도, 손죽도와 마주한 큰 바다와 접해 있다.

지금은 젊은 사람은 모두 나가고 20여 명이 살고 있다. 이들마저 대부분 70대와 80대다. 지금 어장배가 겨우 한 척에 불과해 어촌이라 말하기 민망하지만 당시에는 중선배 수십 척이 선창을 메웠다.

조기, 민어 등 ‘굵은 고기’를 잡기 위해 목포, 칠산바다, 군산까지 배를 타고 오갔다. 고대구리(저인망) 어업을 할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쑥섬의 섬살이 이야기를 해 주신 고씨와 김씨 할머니
섬살이 이야기를 해 주신 고씨와 김씨 할머니.

 쑥섬에는 당산이 있는 동산을 제외하고는 호미가 들어가는 땅은 모두 일궜다. 그래봐야 ‘논시밭(텃밭을 말하는 전라도말)’ 수준도 못된다.

 

등선에 자리 잡은 정원이 마을에서 가장 넓은 밭이다. 해서 주민들은 조기를 잡아 번 돈으로 섬 밖에 논을 샀다.

쌀도 쌀이지만 초가집 지붕을 얹기 위해서도 볏짚이 꼭 필요했다. 먹고 살기 위해 돈이 모이면 땅에 묻었다. 믿을 게 땅 밖에 없었다. 봉래면 예초리, 도화면 남성리와 봉산리 등에 땅을 사서 배를 타고 가서 농사를 지었다. 불과 한 세대 전 이야기이다.

풍어와 마을 안녕을 기원하며 당산제를 지낼 때 모셨던 당산할머니와 당산할아버지 신위
풍어와 마을 안녕을 기원하며 당산제를 지낼 때 모셨던 당산할머니와 당산할아버지 신위.

고기잡이를 성하게 하던 시절에는 정월에 동산에 올라가 당집에서 지극정성으로 제를 올렸다. 올라가다 돌부리라도 발에 차이면 다시 내려와 목욕재계를 했다.

그것이 부정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제물로 준비하는 것은 밥, 나물, 과일이지만 정성은 말로 다하기 어렵다. 정월초 날을 받아 새벽에 제를 지내고 내려올 때 까지 누구도 우물에 들어가지 못했다. 제를 지내고 내려오면 그때 비로소 물을 길러다가 밥을 짓고 음식을 장만했다.

제를 지낸 후 동이 트면 마을주민들은 ‘앞몰짝’과 ‘건냇몰’ 봄마당에서 다섯 개 상을 차려 놓고 당제를 지낼 때와 같은 제물을 올리고 갯제를 지냈다.

일년 내내 아무 사고 없이 고기잡이를 잘 되게 해달라는 풍어제이자 주민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는 잔치다. 쑥섬에는 개가 없다. 닭도 없다. 당산제를 지낼 때 부정을 탈까 싶어 키우지 못하게 했다. 나중에는 개가 잘 되지 않는 섬이라는 금기사항이 되었다.

“문서에서 빠져부렀어”

길에서 만난 고 할머니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담장너머로 바다가 있고 배가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할머니는 아흔에서 세 살이 모자라는 할머니는 17살에 고흥군 도화읍에서 시집을 왔다. 섬살이 이야기를 듣다 할아버지 안부를 물었다.

하느님 아버지~하고 가부렀어.

 

자연산 돌미역을 채취해 말리는 섬주민.
자연산 돌미역을 채취해 말리는 섬주민.

장독대 너머 바다로 고개를 돌렸지만 할머니 굵은 주름으로 눈물이 흘렀다. ‘먼 세월이 이렇게 빠른지 몰라. 벌써 4년이나 된당께.’ 할머니보다 몇 살 더 많은 김 할머니가 말꼬리를 돌렸다. 김 할머니는 60대에 할아버지를 ‘하느님 아버지’한테 보냈다.

쑥섬에는. 50대 1명, 60대 1명, 70대 2명, 나머지는 모두 80대다. 80대 중에는 고 할머니가 제일 젊다. 가장 젊은 50대와 60대는 고향을 떠났다가 최근 들어온 부부다. 덕분에 쑥 평균연령이 70대로 낮아졌단다.

실상이 이렇다보니 섬을 가꾸는 일을 함께할 사람은 고사하고, 밤새 안녕을 챙겨야 할 판이다. 할아버지는 바다에서 죽을 고비를 네 번이나 넘겼다. 한 번은 속옷만 입고 집으로 들어왔다.

지나던 고기잡이배가 보고 구조해줘서 살았다. 할머니는 진즉 죽을 사람이 ‘(염라대왕)문서에서 빠져서’ 지금까지 살았다고 한다. 이름이 빠져서 네 번이나 데려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뱃길이 멈추지 않기를

배가 도착하자 주민 대여섯 명이 내렸다. 거문도에서 나오는 여행객에게 야채나 바지락을 팔려는 어머니들도 계셨다.

섬을 오가는 작은 철부선은 주민들에게 자가용이자 손발이다. 옛날에는 쑥섬, 선창리, 사양리 각각 나룻배를 운항을 했다. 매달 뱃삯을 거두어서 나룻사공에게 주었다.

 마을 돌담길을 돌아보는 가족
마을 돌담길을 돌아보는 가족.

섬에 학교가 없었기에 배는 통학선이기도 했다. 배가 뜨지 않는 날이면 책보를 머리에 질끈 매고 헤엄을 쳐서 건넜다.

철부선이 다니자 얼마나 편리해졌는지 모른다. 짐도 마음대로 가지고 다닐 수 있고, 때로는 차로 운반할 수도 있었다. 내년이면 운항이 중단된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섬 노인들에게는 다리보다 배가 편리하다. 승용차를 가지고 다니는 젊은이들이야 들어왔다 금방 나갈 수 있어 좋겠지만 노인들은 누군가 신세를 져야 한다. 택시라도 불러야 한다.

객선처럼 시간만 맞추면 나로도까지 편리하게 사람은 물론 짐을 싣고 오가기 어려울 것이다. 자식들이 오가는데 좋겠지만 나이든 섬 주민은 역시 배가 최고다.

일본에서는 다리가 연결되어도 공공버스마냥 배를 운항을 하는 곳도 많다. 배 삯도 아주 저렴하다. 우리에게도 여객선이나 도선 공용제가 절실하다.

김준

◆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어촌사회 연구로 학위를 받은 후, 섬이 학교이고 섬사람이 선생님이라는 믿음으로 27년 동안 섬 길을 걷고 있다. 광주전남연구원에서 해양관광, 섬여행, 갯벌문화, 어촌사회, 지역문화 등을 연구하고 정책을 개발을 하고 있다. 틈틈이 ‘섬살이’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며 ‘섬문화답사기’라는 책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 섬문화답사기, 섬살이, 바다맛기행, 물고기가 왜, 김준의 갯벌이야기 등이 있다.

권중호 기자  k6031k@hnlif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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