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보훈처
[코리아방송]국가보훈처는 오는 15일 제72주년 광복절을 맞아 1909년 전북 김제·전주 등지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옥중 순국한 이영삼(李永三) 선생 등 128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63명(애국장 12, 애족장 51), 건국포장 16명, 대통령표창 49명이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2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된다.

이로써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0,760명, 건국포장 1,212명, 대통령표창 2,807명 등 총 14,779명에 이른다.

□앞으로도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등 관련기관과 사료수집 협업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할 예정이다.

특히, 국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함으로써 알려지지 않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는데 노력해나갈 계획이다.

제72주년 광복절 포상자 중 주요 인물들의 독립운동 공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의병의 군수물자 운반하다 체포돼 옥중 순국한 이영삼 선생 전라북도 김제, 전주 등지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이영삼(李永三)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전북 임피(현재 군산) 출신으로 1909년 (음력) 7월 8일 박찬중(朴贊仲) 의진에 참여해 전북 함열(현재 익산), 전주, 금구(현재 김제) 일대에서 군수물자를 운반하다 체포돼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국가기록원에서 수집한 '합장부'(전주형무소, 1916)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수감된 지 5개월 만에 옥중에서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이루어졌다.

'합장부'는 일제하 형무소에 수감 중 사망한 사람들을 가매장·합장한 내용을 간단하게 기록한 문건이다.

선생의 옥중 순국은 일제의 악형(惡刑)이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비전투 의병에게도 예외 없이 잔혹했다을 보여준다.

대학 재학 중 평양에서 독립만세시위 주도한 김태술 선생 평양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김태술(金泰述)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3월 1일 평양 장대현에 소재한 숭덕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광무황제 봉도회(奉悼會)에 참가해 참여 군중의 선두에서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15일 경에는 독립만세운동 선전을 위해 일제에 보내는 2∼3건의 '경고문'을 작성, 인쇄했다.

이후 선생은 미국인 선교사 모우리(E.M. Mowry)의 자택에 피신해 있다가 4월 5일 경 10명의 동료들과 함께 체포돼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모우리는 3·1운동 당시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일로 일제에 체포돼 재판까지 받은 선교사로, 195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선교사들이 3·1운동을 적극 지원한 사례로도 주목된다.

강화도에서 만세시위 참여하다 체포돼 태형받은 계기봉 선생 강화도에서 3·1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돼 태형을 받은 계기봉(桂基奉) 선생께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선생은 기독교 신자로 1919년 3월 18일 경기도 강화군 부내면 읍내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해 독립만세를 부르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태 90도를 받는 등 고초를 치렀다.

부내면 읍내시장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기독교도 유봉진(劉鳳鎭, 1990 애족장)이 목사 이진형(李鎭亨)의 집에서 황도문(黃道文, 2001 건국포장) 등과 회합해 계획을 모의했다.

동월 18일 읍내시장에서 염성오(廉成五, 1990 애족장), 유희철(劉熙哲, 1990 애족장) 등과 함께 '강화군민에게'라는 격문을 뿌리며 1만여 명에 이르는 군중이 집결한 강화도 최대의 대규모 시위였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국가보훈처의 자체 발굴 후 후손 확인을 거쳐 이루어졌다.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 주도한 열혈 여학생, 최윤숙 선생 1930년 초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최윤숙(崔允淑) 선생께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선생은 1930년 1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1929년 11월에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된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해 학생시위를 주도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돼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최복순(崔福順, 2014 대통령표창) 등 학우들과 함께 진명·숙명여자고보 등 서울시내 다른 여자고보와는 물론, 휘문고보 등 남자고보와도 연대해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에 앞장섰다.

선생 등은 광주학생운동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고 일제의 식민정책과 교육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선생의 활약상은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동조시위에 참여하는 여학생들의 참여 방식과 활동 양상을 잘 보여준다.

독립운동 지원에 앞장선 미주 독립운동계 대모 박영숙 선생 미국에서 여러 여성독립운동 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지원에 앞장선 박영숙(朴永淑) 선생께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다뉴바에서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 서기,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위원, 1921년 국민대표회 다뉴바지방회 회원, 1922년 대한여자애국단 다뉴바 총부 재무로 활동했다.

이어 1930년부터 1939년까지 대한인국민회 딜라노 지방회 회원,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대한여자애국단 딜라노지부 재무, 1943년 동 지부 단장 등으로도 활동했다.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며,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의연’, ‘의무금’, ‘특별연’, ‘3·1절 기념금’, ‘국치기념금’, ‘독립금’, ‘광복군 후원금’ 등의 명목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한국광복군 등에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대한인국민회 집행위원장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부위원장 등으로 미주 독립운동을 이끈 한시대(韓始大, 1995 독립장) 선생이 남편이다.

식민지 본국의 차디찬 감옥에서 독립을 절규한 윤구용 선생 일본에서 반제 항일운동 조직에 참여해 활동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윤구용(尹九鏞)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29년 경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체류 중 1933년 ‘민족의식’으로 무장하고 활동한 혐의로 체포돼 6개월 여 동안 유치됐다.

이듬해 2월 반제 동경지방조직(반제동맹 동경지방위원회)에서 활동하다 다시 체포돼 투옥됐다가 같은 해 10월 병 보석으로 석방 직후 서거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특고월보'(1934.1∼1937.12) 기사 및 동경 체류 중 국내의 부친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활동내용 등이 확인됨으로써 이루어졌다.

1930년에 보낸 편지 한통을 소개하면 “봄은 왔습니다. 계급적 구속과 민족적 억압의 이중 질곡에 신음하는 우리 반도의 대자연은 그 은택을 균점(均霑)하리니 (중략) 우매한 불초자도 중첩한 민족적 모욕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더욱 높게 더욱 강하게 자라가겠습니다.

선생이 부친께 보낸 절절한 내용의 편지는 40여 통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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